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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24

그해 봄/병 - 도종환 그해 봄/병 그해 봄 병 도종환 그해 봄 도종환 그해 봄은 더디게 왔다 나는 지쳐 쓰려져 있었고 병든 몸을 끌고 내다보는 창 밖으로 개나리꽃이 느릿느릿 피었다 생각해보면 꽃 피는 걸 바라보며 십 년 이십 년 그렇게 흐른 세월만 같다 봄비가 내리다 그치고 춘분이 지나고 들불에 그을린 논둑 위로 건조한 바람이 며칠씩 머물다 가고 삼월이 가고 사월이 와도 봄은 쉬이 오지 않았다 돌아갈 길은 점점 아득하고 꽃 피는 걸 기다리며 나는 지쳐 있었다 나이 사십의 그해 봄 병 도종환 마음속 불꽃이 병이 된다 가슴속 북풍이 병이 된다 불 같은 그리움 얼음 같은 외로움이 병이 된다 기나온 내 생애의 발자국마다 나로 인해 내린 비가 병이 되어 고인다 불 타며 불 타며 병이 된다 바람 불어 바람 불어 병이 된다 2017. 12. 30.
어떤 날/봄산 - 도종환 어떤 날/봄산 어떤 날 봄산 도종환 어떤 날 도종환 어떤 날은 아무 걱정도 없이 풍경 소리를 듣고 있었으면 바람이 그칠 때까지 듣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집착을 버리듯 근심도 버리고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나뭇잎을 다 만나고 올 때까지 홀로 있었으면 바람이 소쩍새 소리를 천천히 가지고 되오는 동안 밤도 오고 별 하나 손에 닿는 대로 따다가 옷섶으로도 닦고 또 닦고 있었으면 어떤 날은 나뭇잎처럼 즈믄 번뇌의 나무에서 떠나 억겁의 강물 위를 소리없이 누워 흘러갔으면 무념무상 흘러갔으면 봄산 도종환 거칠고 세찬 목소리로 말해야 알아듣는 것 아니다 눈 부릅뜨고 악써야 정신이 드는 것 아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몸짓들 모여 온 산을 불러 일깨우는 진달래 진달래 보아라 작은 키 야윈 가지로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철쭉꽃 산.. 2017. 12. 29.
동안거/법고 소리 - 도종환 동안거/법고 소리 동안거 법고 소리 도종환 동안거 도종환 장군죽비로 얻어맞고 싶다 눈 하나 제대로 뜨지 못하고 어둡게 앉아 있는 내 영혼의 등짝이 갈라지도록 안락의 답답한 표피 하나 못 걷고 유혹의 그 알량한 속껍질 속으로 기어드는 정신을 도래방석에 얹어 누가 도리깨로 두들겨주었으면 싶다 물을 맞고 싶다 수직의 날카로운 폭포를 칼날 같은 물끝으로 누가 이 어리석은 육신을 얼음처럼 다 드러나 보이게 꿔뜷고 지나가주었으면 싶다 법고 소리 도종환 일주문 아래 물줄기 손을 담그자 법고 소리가 물을 흔들면 울려왔다 서녘하늘 저녁노을 두드리며 소리는 바알갛게 번져갔다 물가에는 찔레가 하얗게 지고 숲에는 산목련꽃이 몸을 태웠다 번뇌도 꽃잎처럼 여기 버리고 그 무거운 세상인연도 버릴 때가 되었다 발을 묶은 그리움도 이.. 2017. 12. 29.
오늘도 절에 가서/보리수나무/지는 꽃 보며 - 도종환 오늘도 절에 가서/보리수나무/지는 꽃 보며 오늘도 절에 가서 보리수나무 지는 꽃 보며 도종환 오늘도 절에 가서 도종환 오늘도 절에 가서 절집만 보고 왔다 요사채 아궁이 동자승이 두드리던 부지깽이만한 말씀 한 도막 못 얻어왔다 오늘도 절에 가서 절 뒤의 산줄기만 보고 왔다 오늘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왔다 십 년 넘게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았지만 마음속 한치도 못 들어가본 사람은 더 많았다 보리수나무 도종환 보리수나무 잎이 지고 있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당신은 말씀이 없으셔 사방은 적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뒷산 숲도 맞배지붕 위에 내려와 턱을 고이곤 먼 데 하늘을 바라볼 뿐 보리수나무 잎만 가끔씩 지고 있었습니다 범종 소리 사라진 쪽 바라보며 말이 없으신 당신을 쳐다보다 보리수 그늘 돌아나오는 저녁 쯧쯧,.. 2017.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