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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윤동주 시모음- 자화상, 십자가, 새로운 길, 별헤는 밤

by 행복한 엔젤 2018.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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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간판(看板) 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 붙는 문자(文字)도 없이


모퉁이 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태초(太初)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빠알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은 어린 꽃과 함께

 

 

 

 

 

또 태초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게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붓끄렌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슬픈 족속(族屬)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고무신 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겸은 옷을 입히시요.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요.


그리고 한 침대에
가즈런히 잠을 재우시요.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요.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 게외다.
 

 

 

 ♥ 무서운 시간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눈감고 간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 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별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
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 들의 패(佩), 경(鏡),
옥㈤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
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
아지 ,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 할 게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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