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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한국현대시] 자화상(自畵像) - 서정주

by 행복한 엔젤 2017.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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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시/자화상(自畵像)/서정주

 

 

한국현대시

자화상(自畵像)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숫캐마냥 헐덕거리며 나는 왔다.

 

*한 주: 한 그루.

*달을 두고: 여자가 임신한 상태를 말한다.

 

 

**서정주(1815~2000)**

호는 미당(未當).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였으며, 1936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당선된 이후 동인지 『시인 부락』을 주재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시는 『화사집』(1941), 『귀촌도』(1946) 등과 같이 초기에는 강렬한 생명의 솟구침을 주제로 하는 특색을 보였고, 『신라초』(1960) 무렵부터는 '신라 정신'을 지향하면서 다른 경지를 추구하였다. 이후로는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띠면서 시집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등을 남겼다. 그의 시에 대한 핵석과 평가는 보는 이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우리 현대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정되고 있다.

 

[출처=한국 현대시를 찾아서|푸른나무|김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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